
나른한 휴일의 정적 속에서, 손가락 끝 하나로 스마트폰 화면을 끊임없이 올리다 보면 현실의 감각은 이내 마비되곤 합니다. 몇 초짜리 짧은 동영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디지털의 바다. 그 무한한 스크롤 속에서 우리는 문득 기이한 아득함을 느낍니다. 도대체 이 방대한 양의 영상들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이토록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일까요?
글로벌 영상 플랫폼에 단 1분 동안 누적되는 비디오의 분량은 이미 500시간을 가뿐히 넘어섭니다. 하루에도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각적 기록이 새로 구축되는 셈입니다. 인간이 대본을 집필하고, 카메라 렌즈를 조율하며, 편집실의 불을 밝히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의 스케일입니다. 이 기이한 생산력의 중심에는 바로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연출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프레임을 점령한 알고리즘
최근 동시아권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거세게 불어닥친 ‘AI 미니드라마’ 열풍은 콘텐츠 생산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2026년 1분기 기준, 중국 시장에서 선보인 12만 8천여 편의 단편 드라마 중 인공지능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작품은 단 5%에 불과합니다. 불과 상반기 만에 220억 위안(한화 약 4조 2천억 원) 규모로 팽창한 이 가상 드라마 시장은, 연말에는 400억 위안(한화 약 7조 6천억 원)이라는 거대한 산업으로 우뚝 설 전망입니다.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투어 출시한 생성형 AI 툴은 과거 인간 배우와 스태프가 수행하던 고된 노동을 순식간에 대체했습니다. 제작 비용은 기존의 10분의 1 수준으로 곤두박질쳤고, 몇 달씩 걸리던 작업 기간은 단 며칠의 클릭질로 단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교한 효율성의 탑 뒤편에서 곧 뜻밖의 균열이 찾아왔습니다. 화면을 채우는 가상 인물들의 단조로움, 이른바 ‘디지털 피로감’이 대중을 습격한 것입니다.
매끄럽지만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무표정, 어디선가 본 듯 복제된 이목구비, 그리고 타인의 얼굴을 무단으로 모방하여 발생한 수백 건의 초상권 분쟁은 제작사들을 새로운 고민에 빠뜨렸습니다. 알고리즘이 만든 매끄러운 가짜에는 인간 고유의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10만 원에 판매되는 인간의 아우라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초상권 거래(Facial License)’라는 기괴하고도 신선한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가짜 인물에 피로감을 느낀 제작사들이 합법적이면서도 저렴하게 ‘진짜 사람의 표정과 아우라’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액트아이디(ActID)’나 ‘뉴 클로(New Claw)’ 같은 플랫폼은 이러한 거래가 이뤄지는 디스토피아적 시장의 장터입니다. 이곳에 자신의 얼굴을 등록하는 과정은 지극히 간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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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기 없는 민낯의 정면, 측면, 전신 이미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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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 정도나 악역 출연 여부 등 최소한의 거부 조건을 설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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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 인증을 마치면 단 30분 만에 한 인간의 생체 정보가 상업용 카탈로그의 '상품'으로 등록됩니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얼굴이 가지는 디지털 상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안타깝게도 그 가격표는 허망할 정도로 가볍습니다. 일반인의 얼굴은 1회 사용당 약 100~500위안(한화 약 2만~10만 원) 안팎에서 소비됩니다. 노련한 표정을 지닌 무명 배우나 특이한 인상의 소유자가 간혹 100만 원대의 값을 매기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얼굴은 한 끼 식사비 정도의 소액에 '용돈벌이'라는 이름으로 손쉽게 거래됩니다.
회수할 수 없는 영혼의 흔적
더 큰 문제는 일단 디지털 바다로 유출된 얼굴이 어떤 서사 속에 던져질지 본인조차 가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계약서상으로는 자극적인 범죄자나 불륜 등의 악역 설정을 거부할 수 있다고 명시하지만, 인공지능이 수천 가지 버전으로 재조합하고 변형하는 제작 과정에서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오용되는지 개인이 일일이 감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내가 듣도 보도 못한 가상 드라마 속에서 가장 음습하고 불쾌한 인물로 연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더욱 치명적인 위험은 ‘계약 이후의 삶’에 있습니다. 플랫폼에 등록하는 절차는 터치 몇 번으로 손쉬웠지만, 자신의 생체 데이터를 영구히 삭제하거나 회수하려 할 때 회원 탈퇴 버튼조차 찾기 힘들다는 피해 호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향해 엄중한 경고를 보냅니다. 얼굴을 판다는 것은 단순히 사진 한 장을 대여하는 차원이 아니라, 뇌파나 지문처럼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생체 식별 정보를 타인의 통제 아래 넘겨주는 위험천만한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데이터 보안 및 2차 유출 방지에 대한 명확한 법적 담보가 없다면, 한 번 넘겨준 내 신원 정보는 언제든 정체 모를 디지털 공간에서 기괴하게 복제되어 나를 위협하는 칼날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배경 엑스트라로 전락한 존재들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보조하는 단계를 넘어, 인간 존재의 외형마저 1회용 소모품처럼 소비하는 시대. AI라는 거대한 콘텐츠 공장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장면의 구석을 채우는 저렴한 배경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 씁쓸한 풍경이 과연 특정 국가나 먼 미래의 일에 불과할까요?
머지않은 날, 우리의 목소리와 억양, 고유한 손짓, 심지어 특유의 걸음걸이마저 조각조각 해체되어 단돈 몇천 원짜리 디지털 라이브러리로 팔려나가는 풍경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공지능이 구축한 수억 개의 무한한 가상 세계 속에서, 진짜 인간은 그저 저렴하게 채워 넣는 엑스트라로 남겨질지도 모릅니다.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과실 뒤에 감춰진 '인간 존엄성의 가격표'.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요.
*기사에 삽입된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제작하였습니다.
한국e마케팅저널 김수연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