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대기업 원청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이 날아든다. 납품을 계속하려면 협력사의 '스코프3(Scope 3) 탄소 배출량' 데이터를 제출하라는 내용이다. 당장 이번 주 납품 물량을 맞추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50인 미만의 영세 제조 현장에서 이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다.
스코프3라는 외계어 같은 용어 앞에서 실무자는 당황하고, 경영진은 결국 수천만 원을 부르는 외부 ESG 컨설팅 업체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자본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글로벌 규제는 중소규모 기업의 목을 조르는 보이지 않는 폭력처럼 작용한다.

하지만 원청이 요구하는 거창한 탄소 데이터의 실체를 파악하면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대기업이 말하는 스코프3란 자사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량을 뜻한다. 즉, 대기업 입장에서는 협력사인 중소기업이 부품을 만들 때 내뿜는 탄소가 스코프3에 해당한다.
이를 중소기업의 현장 언어로 번역하면 결국 우리 공장이나 매장이 한 달 동안 사용한 '전기'와 '가스'의 양이다. 복잡한 화학 기호나 수십억 원짜리 탄소 포집 설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품을 깎고 조립하기 위해 모터를 돌리고, 용접기를 켜고, 공장을 난방하는 데 사용한 에너지의 총량이 곧 원청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탄소 배출 데이터의 핵심 원천이다.
따라서 값비싼 외부 컨설팅을 부르기 전에 기업 내부에서 가장 확실한 데이터를 찾아내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데이터는 다름 아닌 경리부서 캐비닛에 쌓여 있는 '에너지 고지서'다. 한국전력에서 날아오는 월별 전기요금 청구서, 도시가스 요금 영수증, 그리고 지게차나 법인 차량에 주유하고 받은 주유소 영수증이 바로 탄소 배출량을 증명하는 1차 원시 데이터다.
이 고지서들에 적힌 전력 사용량(kWh)이나 가스 사용량(㎥)을 엑셀에 월별로 기입하고, 정부에서 매년 발표하는 온실가스 배출계수를 곱하는 것만으로도 원청이 요구하는 기초적인 온실가스 인벤토리를 훌륭하게 방어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은 당장의 납품 단가를 올려주지 않으며, 실무자에게는 귀찮고 짜증 나는 엑셀 작업의 연속일 뿐이다. 고지서를 모은다고 해서 당장 공장의 전력 소모율이 줄어드는 기적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지난한 서류 작업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다가오는 재계약 시점에서 거래처를 잃게 되는 것이 작금의 냉혹한 현실이다. 글로벌 ESG 규제라는 거대한 파도를 소규모 기업이 맨몸으로 막아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휩쓸려가지 않을 구명조끼는 스스로 입어야 한다.
오늘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행동은 명확하다. 재무 담당자에게 지난 12개월 치의 공장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청구서를 복사하여 하나의 바인더에 시간순으로 철해두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이 투박한 고지서 묶음이 수천만 원짜리 컨설팅 보고서보다 훨씬 더 강력한 중소기업의 첫 번째 탄소 데이터 보고서가 될 것이다.
[※ 칼럼의 그림 및 도표는 AI 활용하여 작성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