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동안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수수께끼 같은 암호 문서들이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 덕분에 마침내 세상에 그 비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 세계 보관소 자료의 약 1%는 전체 또는 일부가 암호화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거의 외교 기밀이나 비밀 결사의 의식, 금기시되었던 의학 지식, 그리고 은밀한 연애 편지 등 역사 속에서 사라질 뻔했던 생생한 기록들이 이제 AI의 손을 거쳐 해독되기 시작했습니다.
바티칸 도서관(Vatican library)에 400년 넘게 읽히지 않은 채 보관되어 있던 408페이지 분량의 '보르그 암호(Borg cipher)'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34개의 독특한 기호와 로마자, 아랍어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이 필사본은 마녀사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기록된 의학 치료법을 담고 있었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교(Stockholm University)의 컴퓨터 언어학 전문가인 베아타 메제시(Beáta Megyesi) 교수가 참여한 연구진은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기술을 활용해 이 까다로운 암호를 풀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해독 결과 문서 안에는 이질을 치료하기 위해 고품질 레드 와인을 마시거나 반죽에 육두구를 넣어 발효시키는 등의 독특한 치료법들이 가득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과거의 암호 문서를 해독하려면 먼저 손으로 쓴 글씨나 흐릿해진 잉크 자국을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는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는 정밀한 전사(Transcription)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프랑스 국립컴퓨터과학연구소(INRIA)의 암호학자 세실 피에로(Cecile Pierrot) 박사는 생소한 기호로 가득한 두 페이지짜리 문서를 전사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설명합니다. 그녀는神聖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 5세(Charles V)가 암살 음모에 대한 공포를 담아 보낸 500년 전의 3페이지짜리 비밀 편지를 해독하기 위해 무려 6개월 동안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지루한 전사 과정을 단축하기 위해 언어와 필기 스타일을 학습한 AI 플랫폼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University of Oslo)의 미셸 발디스퓌을(Michelle Waldispühl)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트랜스크리부스(Transkribus)'라는 AI 툴을 활용하여 1637년 30년 전쟁(30 Years' War) 당시 귀족 지기스문트 호이스너 폰 반더스레벤(Sigismund Heusner von Wandersleben)이 스웨덴의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에게 보낸 비밀 편지를 성공적으로 변환했습니다. 숫자와 점으로 정갈하게 코딩된 이 편지에는 스웨덴의 개신교 동맹국 내에서 벌어진 음모와 배신에 대한 경고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AI 플랫폼들은 고유한 발명 기호나 점성술 문양처럼 변칙적인 암호가 등장하면 인식에 큰 어려움을 겪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메제시 교수와 발디스퓌을 교수 공동 연구진은 '디스크립트(Descrypt)'라는 다국적 프로젝트를 통해 훨씬 더 광범위하고 특이한 기호들까지 척척 읽어낼 수 있는 맞춤형 AI 모델을 개발하는 중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일일이 컴퓨터에 문자를 입력해 주지 않더라도, AI가 문서 사진 한 장만 보고 곧바로 내용을 해독해 내는 단일 단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연구진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거 독일의 비밀 결사 조직의 규율을 담았던 '코피알레 암호(Copiale cipher)' 문서와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 사이에 주고받은 400여 통의 암호 엽서 등 다양한 역사적 데이터를 수집해 AI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기반으로 구축된 이 챗봇 형태의 새로운 AI 도구는 이미지 인식 알고리즘과 역사 문맥 분석 기능을 결합하여 작동합니다. AI가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억측을 하거나 헛소리를 만들어내는 '환각 현상(Hallucination)'을 방지하기 위해, 해독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논리적 근거를 함께 제시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암호 해독 AI 챗봇에 과거 연구진을 애먹였던 '보르그 암호'의 일부를 입력하자, 단 29분 만에 500개의 기호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영어 번역본까지 매끄럽게 출력해 냈습니다. AI는 시대별 언어 특징과 기호의 배열 패턴을 스스로 파악해 내며, 복잡성과 언어가 제각각인 다른 시대의 암호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풀어내는 놀라운 성능을 증명했습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수정 사항을 실시간으로 피드백 받아 스스로 성능을 계속해서 진화시키는 학습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도서관에서 발견한 고문서나 옛 암호 편지 사진을 이 AI 챗봇에 업로드하여 손쉽게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입니다. 나아가 이 기술은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발견된 4,000년 전의 '파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c)'이나 고대 그리스의 미해독 문자인 '선문자 A(Linear A)'처럼 인류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고대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AI의 압도적인 연산 속도와 패턴 발견 능력은 전 세계 기록 보관소에 잠들어 있는 인류의 잃어버린 역사와 비밀들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깨워내고 있습니다.
한국e마케팅저널 김수연 기자 |









